제자입니까?(눅14:25-27, 33)
아르헨티나의 후안 카를로스 오르티즈(Juan Carlos Ortiz) 목사는 그의 책 “제자입니까?Disciple“ 에서 다음과 같은 스토리에 대해 말씀합니다. 오르티즈목사는 교회가 부흥은 하고 있었지만, 그는 목회에 무언가 잘못되고 가고 있음을 느끼고 모든 목회 활동을 중지하고 2주 정도 한적한 곳으로 가서 묵상하며 기도하기 시작했는데 그때 성령으로부터 충격적인 말씀을 듣습니다.
“너는 코카콜라 회사가 코카콜라를 파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리더스 다이제스트사가 잡지와 책을 파는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복음을 전하고 있다. 너는 학교에서 배운 모든 술수를 쓰고 있다. 도대체 네가 하는 일들 가운데 어디에서 나의 손길을 찾아보겠느냐?” 두번째로 그가 들은 말씀은, “너는 자라나고 있질 않다 네 생각에, 네가 교인 수를 200명에서 600명으로 늘렸다고 해서, 자라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그것은 자라는 것이 아니라 살이 쪄 가는 것이다”
이 성령의 말씀을 통해 오르티즈목사는 제자사역에 눈이 뜨이게 됩니다.
성도여러분, 당신은 제자입니까?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이 이 땅에 공생애 3년기간의 핵심사역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12명의 제자를 키우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전에 유언처럼 남긴 말씀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나는 정기적으로 예배에 출석하는 정도의 교인입니까? 아니면 나는 성경에서 말씀하는 예수의 제자인가 입니다. 주님은 내가 성숙한 예수의 제자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내가 변화되면 세상이 변화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자신도 자신의 12명의 제자를 통해서 세계를 변화시킬 비전이 있었습니다. 10명의 의인이 없어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한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오늘 우리 교회나 가정이나 사회의 어려움과 문제점은 성숙한 예수님의 제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은 교회에 몇명의 성도가 모여서 예배를 드리느냐가 아니라 우리 교회에는 몇명의 제자가 있느냐는 질문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 교회에, 우리 가정에, 우리 사회에 정말 절실한 것은 성숙한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누가 제자입니까? 제자는 스승이신 예수님을 따라가는 자이며, 예수님처럼 되고 예수님 처럼 사는 자입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주님을 믿기로 한 자는 모두 예수의 제자로 표현했습니다. 그런데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분명히 군중과 제자를 구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안에 머무는 자가 제자가 하셨고, 서로 사랑하면 세상사람이 제자로 알게 될 것이라 말씀하셨고, 열매를 많이 맺으면 예수의 제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더욱 분명하게 군중과 제자의 차이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예수의 제자입니까? 오늘 말씀을 통해 예수의 제자의 삶으로 헌신하시기를 바랍니다.
1. 첫번째 자리로 예수님 사랑하기
(눅 14:26, 개정)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자신의 제자가 되려면 우리가 자기 부모와 아내와 형제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도 미워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이 말씀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십계명을 통해 축복까지 약속하시며 부모를 공경할 것을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부모를 거역하는 자는 돌로 쳐 죽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자기 아내를 주께서 교회를 사랑하는 것처럼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형제에 대하여 라가(바보)라고 욕하는 자는 지옥 불에 떨어질 것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딤전5:8절을 보면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들을 미워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본문에 미워하라는 말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요? 여기서 미워하라는 말은 문자적으로 실제적으로 미워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헬라어로 미워하다는 말이 ‘미세오’인데 이 말의 실제적 의미는 ‘덜 사랑하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본문과 유사한 내용을 담고 있는 마10:37절을 보면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마10:37)
이것은 부모나 형제 자매를 인간적으로 미워하거나 버리라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주님을 따르는 제자기 되기 위해서는 사랑의 우선순위가 분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제자가 되려면 내가 사랑하는 것의 우선순위가 바르게 정해져야 합니다. 내 부모나 형제자매 때문에 주님을 등한시 하거나 멀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어떤 인간관계도 하나님 사랑보다 우선할 수 없음을 강조하는 역설적 표현입니다.
우리는 부모님을 공경하고 그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우리는 내 아내를 사랑해야 하고 자녀를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그들로부터 미움을 받을 각오를 해야합니다. 심지어는 관계가 끊어질 수도 있다는 것을 각오해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나는 예수님을 최고로 사랑하고 있습니까? 예수님과의 관계가 최우선관계인가요? 먼저 여러분은 무엇을 가장 많이 생각하는지 살펴보세요? 늘 사랑하는 예수님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여러분의 시간을 어디에 사용하는지 자신을 살펴보세요. 첫시간, 아침의 소중한 시간을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기도하며 교제하며 주님과 시간을 보내고 있나요? 사랑하는 사람은 자꾸 보고 싶고 만나고 싶고 교제하고 싶은 욕구가 있습니다. 여러분에게도 더 많은 시간을 주님과 교제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왜 주님이 마르다를 책망하고 마리아를 칭찬했을까요? 열심히 봉사하는 마르다를 예수님이 책망한 이유는 우선순위 때문이었습니다. 주님께 섬기는 것은 귀한 것이지만 마음이 분주한 상태에서 섬기는 것을 주님은 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봉사는 하지 않았지만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마리아를 칭찬하면서 한가지만 필요하다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 한가지가 무엇입니까? 주님과의 사랑하는 교제가 사역이나 봉사보다 우선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이 참으로 원하는 것은 말씀과 기도로 주님과 친밀한 교제를 통해 삶의 방향과 능력을 힘입어 우리가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예수님을 최고로 사랑하면 부모, 처자, 형제자매, 자기 자신을 더 잘 사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누가 제자입니까? 예수님을 누구보다 무엇보다 사랑하는 사람이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2. 십자가
(눅 14:27, 개정)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아버지의 뜻인 인류구원을 위해 죽으셨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치러야 할 댓가와 희생을 말한다.
그러므로 자기 십자가란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치러야 할 댓가와 희생을 말합니다. 각자의 역할과 위치속에서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엄마로서, 아내로서, 아버지로서, 남편으로서, 교회에서 주어진 직분속에서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그 뜻을 이루기 위해서 반드시 치러야 할 댓가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는 자가 예수의 제자라 말씀하십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신앙고백을 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그러자 예수님이 갑자기 고난받고 죽임을 당하고 삼일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 때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22절)”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23절)”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24절)”
예수님이 지적하고 싶은 것이 무엇입니까? 베드로가 진정으로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자기를 부인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베드로가 가졌던 생각, 베드로의 인간적인 꿈, 베드로의 가치관, 인생관 등이 모두 깨어지고 변화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지고 따라오라고 하십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합니까? 십자가를 지기 위해서 먼저 나를 향한 아버지의 뜻을 분별해야 합니다. 나를 향한, 나의 가정을 위한, 우리 교회를 향한 아버지의 뜻이 무엇인가?그 뜻을 알아야 그 뜻을 위해, 그 비전과 사명을 위해 각자의 십자가를 질 수 있게 된다.
십자가는 축복의 길이요 영광의 길입니다. No cross no crown. 십자가없이 면류관없습니다. 십자가는 희생이요 힘든 것이지만, 자신과 남을 위한 축복의 길입니다. 요 12:24,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은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되 다른 사람의 십자가가 아닌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좇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내가 져야할 자기 십자가가 있습니다. 나만이 지고 가야 할 십자가가 있습니다. 내가 져야할 가정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내가 지고 가야만 하는 사명의 십자가도 있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른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지 아십니까? 때로는 괴롭고 답답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를 지지 않고 타협해 버릴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기억하십시오. 주님을 위해 십자가를 지는 댓가를 지불하지 않고서는 주님의 참된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누가 제자입니까? 자신의 십자가를 기쁨으로 지고 주를 따르는 자입니다.
3.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눅 14:33, 개정) 이와 같이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자기의 소유를 버리라는 것도 결국 자기 삶의 모든 영역에서 자신이 주인 되는 것을 포기하고 하나님께 주권을 맡기라는 것입니다. 매 순간의 삶을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능력으로 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왜 소유를 문제 삼습니까? 소유가 인간의 가장 큰 욕망이고 절실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물질의 문제를 극복하지 못한 사람은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소유를 버리라는 말은 적극적인 의미에서 모든 소유, 지식, 은사, 능력, 물질을 하나님을 위해 적극적으로 드리라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사람인 우리는 모든 소유권을 주님께 양도한 사람들입니다. 이것을 성경은 청지기적인 삶이라고 말합니다. 청지기의 삶이 무엇입니까?
‘주님!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의 주인은 주님이십니다. 주님께서 그 모든 것을 잠깐 나에게 맡기셨습니다. 시간도 물질도 자녀도 기업도 따지고 보면 나의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잠깐 나에게 맡기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주님께서 맡기신 것들을 바르게 관리하며 사용하다가 다시 주님께 돌려 드리겠습니다.’ 이것이 바로 청지기적인 삶입니다.
아프리카의 원주민들이 원숭이를 어떻게 사냥하는지 아십니까?
원숭이를 사냥하는 방법은 매우 간단합니다. 원숭이들이 다니는 길목의 나뭇 가지에 열매를 넣은 다음 조롱박을 매달아 놓습니다. 그리고 조롱박에 원숭이의 손이 겨우 들어갈 만구멍을 뚫어 놓습니다. 원숭이는 조롱박에 들어 있는 맛있는 열매를 확인하고 그 속에 손을 집어 넣습니다. 그런데 그 조롱박의 구멍이 너무 작아서 열매를 움켜쥔 손을 빼내지 못합니다. 사냥꾼들이 몰려 오면 원숭이 자신이 쥐고 있는 열매를 놓고 도망을 가면 되는데도 원숭이는 그걸 붙잡고 있다가 사람들에게 붙잡히고 맙니다.
원숭이는 손만 놓으면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열매에 대한 욕심 때문에 그것을 붙잡고 있다가 그열매를 먹어 보지도 못한채 사냥꾼에게 잡혀가는 것입니다. 이 어리석은 원숭이에 대한 이야기는 그만큼 포기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오늘날 전 세계에서 무려 10억명이 넘는 이들이 극심한 빈곤상태에서 생활하다가 죽어간다. 그들은 오늘도 하루에 1달러 남짓한 돈으로 근근히 목숨을 이어가고 있다. 2달러 미만으로 하루를 버티는 이들까지 합하면 그 수가 20억명에 육박한다. 세계인구의 절반이 햄버거 하나값에도 못미치는 돈으로 음식과 식수, 주거를 해결하느라 허덕이고 있다. 오늘 하루도 2만 6천명의 아이들이 굶주림과 얼마든지 예방 가능한 질병으로 숨을 거두고 있다. 내가 DTS 훈련팀과 같이 인도의 콜카타(캘커타)지역에 전도여행했을 때 슬럼가에 살고 있는 수많은 아이들과 부모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곳에는 세아이 네 아이, 다섯아이를 둔 가정들이 그 작은 방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식수는 제한적이고 음식은 먹을 것이 없었다. 그런 빈민가가 몇 키로미터씩 늘어서 있다. 1, 2달러가 없어서 죽어가는 이웃이 바로 곁에 있음을 안다면 그들의 얼굴을 보면서 우리는 모두 선택을 해야한다. 가진 것을 나눠주고 주님을 끌어안을 수고 있고 예수님을 외면한채 재물을 쌓을 수도 있다.
우리는 물질을 검소하게 사용해야 한다. 낭비하지 말아야 한다. 사치품들을 팔아서 문밖에서 떨고 있는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야 할 것이다. 물질의 욕심으로 자유케 되는 길은 나누어주는 것이다. 우리 삶의 라이프 스타일에 변화가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드리라. 십일조로 드리라. 선교헌금, 목적헌금으로 하나님께 드리라.
기독교진리는 역설적인 진리입니다.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복이 있고 죽는 자가 다시 살며 주를 위해 모든 소유를 포기한 자가 금생과 내세에 더 많이 받게 됩니다. 예수님보다 재물을 더 사랑한 사람은 영생을 포기했습니다. 예수님보다 물질을 더 사랑하면 그것은 우상이요, 영적인 간음입니다(마 6: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듯이 재물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정말로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는가 살펴보아야 합니다. 노아는 모든 재산을 바쳐서 방주를 지었으며 아브라함은 독자 이삭까지 드렸습니다. 우리가 가진 소유가 무엇인지 주님이 원하시면 언제나 드릴 수 있는지 확인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도에 대가가 필요함을 설명하기 위하여 두 가지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하나는 망대의 비유이고 또 하나는 전쟁하는 임금의 비유입니다. 망대를 세우는 것이나 전쟁을 하는 것이 제자가 되는 것과 어떤 연관이 있습니까? 망대를 세울 때 자신이 가진 돈이 충분한지 미리 따져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건축부터 시작했다가 완성하지 못하면 망대도 세우지 못하고 사람들의 웃음거리만 된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지금 건축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을 따르려면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말입니다. 두 번째 비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전쟁을 하려는 왕이 자신의 군대로 상대와 싸울 수 있는지 미리 따져보아야 합니다. 도저히 그가 전쟁에 승산이 없다면 그는 사절단을 보내어 화친하는 것이 낫습니다. 그렇게 않고 무모하게 전쟁을 벌이다가 이기지 못하면 더 큰 화를 불러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지금 군사전략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감정적으로 결정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신중하고 진지하게 생각하고 결정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인 되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가 되는 것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생각해보라고 하십니다.
제자의 삶은 축복된 삶이지만 댓가를 지불해야 하는 삶입니다.
윌리엄 보든에 대해 들어보셨는가? 1800년대 말 낙농회사의 상속자로 태어나 억만장자였던 그는 예일대학과 프린스턴 대학에서 학위를 취득했다. 하지만 그는 그리스도의 제자로 기억되기를 원했다. 그래서 수백만 달러를 버린 채 예수님의 부르심을 따라 머나먼 이슬람교도의 땅으로 떠났다.
윌리엄이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그의 부모는 그에게 세계여행을 권했다. 그리하여 유럽과 아시아, 중동을 여행하던 중 그는 복음이 닿지 않는 곳으로 찾아가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느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을 위한 선교에 삶을 바치겠다는 편지를 부모에게 보냈다. 그리고 나서 자신의 성경 책에 문장 하나를 썼다.
“남김 없이” No Reserves
윌리엄은 예수님을 따르려면 온전한 헌신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았던 것이다. 아버지의 강권으로 예일대학에 들어간 그는 오직 주님만을 사랑하기로 결심했고 한 친구와 함께 아침마다 성경을 일고 기도하는 모임을 시작했다. 그때부터 눈만 뜨면 예일대학 내에 성경읽기와 기도 모임이 하나씩 생겨났다. 그가 4학년이 되자 그런 모임이 1,000개에 달했다. 당시 그는 일기장에 “늘 자신을 부인하고 예수님께 순종하리라”라고 썼다.
“후퇴 없이” No Retreats
또한 대학 시절 그는 뉴헤이븐 거리를 방황하는 노숙자들을 돕기 시작했고, 알코올 중독을 비롯한 중독자들의 갱생을 돕는 예일 호프 미션이란 단체도 세웠다. 그는 재학 중에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막대한 재산을 물려 받았다.
그는 세계 선교로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중국 간쑤성에 복음을 전하가로 마음을 먹고, 중국에 들어가기에 앞서 아랍어를 배우고 이슬람 지역 선교를 준비하기 위해 먼저 이집트로 건너 갔으나 그곳에서 척수막염에 걸려 스물 다섯 살의 아까운 나이에 세상을 떠났고, 카이로에 묻혔다.
“후회 없이” No Regrets.
예일 대학의 영적 부흥을 일으키고 수 많은 사람을 전도했던 그는 영원토록 ‘그리스도의 진정한 제자’로 기억될 것이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 그의 성경 책 속에서 세 개의 문장이 발견되었다.
남김 없이(No Reserves).
후퇴 없이(No Retreats).
후회 없이(No Regrets.) 여러분은 어떻게 사시겠습니까? 윌리암 보든 처럼 제자로 기억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누구보다 무엇보다 예수님을 사랑하십시오.
감사와 기쁨으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십시오.
모든 소유와 모든 것을 하나님나라를 위해 드리십시오. 여러분 모두가 예수님의 제자되어 제자삼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