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의 능력(고전1:18,22-24)
1Co 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1Co 1:18 For the word of the cross is folly to those who are perishing, but to us who are being saved it is the power of God.
우리가 이슬람교에 대해 공부해 보면 기독교인으로서 깜짝 놀랄 일이 있습니다. 저들의 경전인 쿠란(quran)에도 “예수를 믿으라”는 말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이뿐 아니라 쿠란에서 많은 부분을 할애하여 예수에 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꾸란에는 예수님께서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나신 것을 기록하고 있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복음을 전하셨다는 것과 그 복음을 믿어야 한다고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죽은 자를 살리시고 병자를 고치시고 놀라운 기적을 베푸신 것도 사실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것과 다시 재림하실 것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차이가 한 가지 있습니다. 바로 십자가입니다. 저들은 예수의 십자가를 생략하거나 무시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적극적으로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꾸란3:55). 십자가에서 죽음을 모면한 후 샘이 흐르는 곳으로 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꾸란23:50). 그래서 이슬람교는 예수를 구세주가 아니라 알라가 보낸 위대한 선지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 적극적으로 기독교가 예수를 잘못 가르치고 있다고 기독교를 적대시하고 공격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십자가가 빠진 예수는 참된 예수가 아닙니다. 아무리 예수의 기적을 믿고, 예수의 말씀을 따르고, 예수의 동정녀 탄생과 승천까지 믿는다고 해도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가 빠지면 그것은 헛된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예수의 십자가를 부인한다면 아무리 예수를 치켜세우고 심지어 예수를 믿어야 한다고 해도 그들은 이단이요 적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신앙생활을 얼마나 오래했느냐가 아닙니다. 우리의 성경지식이 얼마나 많은지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가 십자가를 알고 있는가? 그리고 그 십자가를 체험했느냐?” 입니다. “그 십자가를 지금도 경험하며 살고 있느냐”가 신앙생활과 인생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십자가의 능력을 경험하고 있습니까? 십자가의 능력은 어떤 능력입니까?
1. 십자가의 도가 멸하는 자들에게 미련한 것.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것이 믿어지십니까? 여러분이 이것이 믿어진다면 이것은 놀라운 기적이요 하나님의 은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세상 사람들은 십자가의 말씀을 미련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1Co 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고전1:22-23
유대인은 메시야를 다윗 왕과 같이 군사적으로 정치적으로 힘있는 사람으로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유대인에게 십자가에 죽은 사람은 실패한 사람입니다. 유대인에게 메시야가 십자가에 달려 죽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다”는 신명기 말씀처럼 “하나님께 저주받은 사람”이 인류를 구원하는 메시아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에게 메시야는 다윗 왕처럼 권세있고 힘있는 자의 모습으로 올 것을 기다리지 이사야53장에 나오는 고난받는 사람을 메시야를 생각하기 불가능했습니다.
로마인의 입장에서 보면 십자가에 달린 메시아 개념은 완전 넌센스였습니다. 십자가 형은 너무나 잔인하고 고통스러워 로마시민에게 사용되는 경우가 극히 드물었다고 합니다. 십자가에서 죽은 사람은 로마인에게는 절대적으로 경멸할 사람이요 인간쓰레기요 가장 낮고 천한 사람에 해당되는 존재였습니다.
또한 당시 헬라인은 이성적, 철학적 지혜를 추구했는데 헬라인에게 신이 십자가 처형과 같은 야만적인 방식으로 세상을 구원하고자 한다는 개념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십자가에 달린 메시아 개념은 유대인에게나 로마인 그리고 헬라인 모두에게 거부감을 주는 혐오스러운 생각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은 강한 것, 좋은 것, 아름다운 것을 추구하는 시대입니다. 고난과 고통을 회피하고 쾌락을 추구하는 시대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 십자가는 철저히 어리석고 보잘것없어 보일 것입니다. 연약함과 초라함의 상징이요 고통스러움과 끔찍함의 상징인 십자가는 오늘날 현대인에게 매력있는 주제가 될 수없습니다.
그러나 구원을 얻는 자에게는 십자가의 말씀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2. 십자가는 구원의 능력.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는 첫째로, 우리에게 구원의 능력이 됩니다. 다시 말하면 죄로부터 용서받는 유일한 길이 십자가입니다. 구원의 길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우리가 인간의 노력으로, 또 많은 수행을 해서, 업적을 남겨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짊어지고 돌아가신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우리가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기독교의 진리는 단순하고 분명하고 정확합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받는다!’ 이것이 우리의 복음 전부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온 인류의 죄를 짊어지고 돌아가셨는데, 그 이유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죄를 사하지 아니하면 어느누구도 하나님께 나아갈 수가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짓고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죄라고 하는 큰 장벽에 가로막히게 되었습니다. 아담과 하와 이후 모든 인류가 죄 가운데 거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죄 가운데 태어나서, 죄 가운데 살다가, 죄 가운데 죽어가는 절망적인 존재가 된 것입니다.
누구도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었습니다. 모든 인간이 죄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구약 시대에는 누군가 죄를 지었을 때 그가 가장 아끼는 짐승이 대신 피를 흘려 죽어야 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었을 때, 그의 수치를 가려주시느라고 짐승을 잡아 피를 흘린 그 피의 제사가 시초가 되어서, 모든 사람이 죄를 짓기만 하면 그가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짐승을 가지고 나와 피를 흘려 죽게 하고 일시적인 죄 사함을 받았던 것입니다.
레위기 17장 11절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제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죄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히브리서 9장 22절입니다.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그래서 죄를 짓기만 하면 그 주인의 죄 때문에 주인이 가장 사랑하는 그 집의 짐승들이 피를 흘려 죽어야만 했습니다. 얼마나 많은 짐승들이 피를 흘렸는지 모릅니다.
요즘 많은 가정에서 강아지를 키우고 고양이를 키우는데 주인을 대신하여 강아지, 고양이가 대신 죽는다고 하면 수많은 강아지, 고양이가 인간의 죄때문에 피흘리고 죽어야 할 것입니다. 또 실제로 주인을 대신해서 강아지가 죽는다면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우리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고 무너지겠습니까? “아! 내 죄 때문에 나의 사랑하는 동물들이 죽는구나. 다시는 죄짓지 말아야지.” 고개를 저으면서 되돌아섰다가 또 죄를 짓고, 또 죄를 짓고, 또 죄를 지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죄 없으신 예수님이 그 모든 구약의 일시적이고 제한적인 죄 사함을 완전히 해결하기 위해서 단번에 영원한 제사를 드리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 29절에 침례 요한이 말합니다.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죄 없으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단번에 영원한 제사를 드리신 것입니다.
히브리서 9장 12절입니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무조건 죄를 용서하실 수가 없었습니다. 동시에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어떻하든지 우리의 죄를 용서하기 원해서 구약에는 짐승이 대신 피를 흘려 죽게 하셨고, 그다음 죄 없으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모든 구약의 제사를 완성하여 영원한 제사로 하나님 앞에 피를 흘려 드린 바가 된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신비요, 은혜요, 축복입니다. 이제 더 이상 죄 사함받기 위해서 짐승의 피를 흘릴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시고 피 흘리며 돌아가실 때 우리의 과거의 죄, 현재의 죄, 미래의 죄가 다 사함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회개하고 예수의 부활의 능력을 힘입을 때 죄 사함 받게 되고 하나님 앞에 의롭다 인정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구원의 능력입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에게 놀라운 하나님의 구원이 선물로 값없이 주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 18절은 말씀합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믿는 것 외에 다른 구원의 길이 없습니다. 사도행전 4장 12절에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고 했습니다.
예수를 믿기만 하면 우리가 구원을 받습니다. 내가 착한 일을 많이 하고, 헌금을 많이 하고, 봉사를 많이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구원받은 후에 주님 앞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우리가 나와 예배드리고, 봉사하고, 주 앞에 귀한 예물을 드리며 섬기는 것이지, 그것이 구원의 전제 조건이 될 수가 없습니다. 구원받는 데는 우리의 믿음만 필요한 것입니다.
“날 위해 피 흘려 돌아가신 예수님, 내가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영접합니다. 믿습니다!” 그 구원의 사건이 우리의 일생을 바꾸어놓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린양 예수님의 보혈을 믿고 의롭다 함을 받고 죄사함받은 것을 믿습니까? 여러분, 구세주와 주님으로 예수님을 여러분의 마음과 삶 속에 모셔들였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이미 십자가의 능력을 얻게 된 것입니다. 십자가는 죄용서의 능력, 하나님 자녀가 되게 하는 능력, 하나님자녀처럼 살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전도로 이 십자가의 복음을 증거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1Co 1: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인도의 부유한 시크족의 가정에서 태어나서 무엇 하나 부러움이 없이 자랐던 선다 싱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님을 믿고 나서 집에서 버림을 받았습니다. 집에서 그ㄹ 죽이려고까지 했습니다. 집에서 쫓겨나온 그는 16살 때부터 맨발로 온 인도를 다니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를 맨발의 성자로 불리게 됐는데, 불교 국가인 티벳에 복음을 전해야겠다는 간절한 열망이 있어서 복음을 전하러 갔다가 그 후로 그가 어찌 되었는지, 히말라야를 넘은 후에 소식이 끊어졌습니다. 마지막으로 남긴 말입니다.
“어느 날 티벳에서 쓰러져 죽는다고 해도 저는 전혀 두렵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날을 기쁨으로 맞이할 것입니다. 저는 해마다 티벳으로 들어갑니다. 제 생명이 그곳에서 끝났다는 소식을 어느 해에 들으시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선다가 죽었구나’라고 생각하지 마시고 ‘선다가 천국에 가서 예수님과 함께 영원히 행복한 삶을 살게 되었구나’라고 생각해주십시오.”
그는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서 무엇 하나 부족함이 없는 삶을 살 수 있었지만, 예수님을 믿는 그것 때문에 모든 것 다 포기하고 한평생 예수님의 십자가만 자랑하며 살다가, 그는 어느 날 어디서인지 모르게 복음 전하다가 마지막 그의 삶을 마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십자가에 위대한 능력이 있습니다. 이 십자가의 능력을 체험해서 우리의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 구원의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죽음 이후엔 두 가지 길만이 열립니다. 한 길은 예수님을 믿고 천국 가는 길이요, 다른 한 길은 예수님을 믿지 않고 살다가 영원한 지옥 형벌에 떨어지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금 하나님께서 우리의 호흡을 연장시켜 주실 때에,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는 주님의 귀한 일꾼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그렇다면 어떻게 오늘 여기서 십자가의 능력을 사용할 수 있을까요?
십자가의 능력을 어떤 식으로 사용할 수 있을까요?
오늘 우리가 사용해야 할 십자가의 능력은
첫째 죄로부터 자유한 능력을 체험하세요. 다시 말하면 구원의 능력이요, 나 자신의 삶의 변화에서 십자가의 능력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우리 삶의 모든 근본적인 문제는 자기중심적인 죄 때문에 일어납니다. 고린도전서 1장에서 일어난 교회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왜 서로 바울파, 베드로파로 갈라져서 분열을 경험하고 있나요? 바로 자기 중심적인 죄 때문입니다. 죄가 있는 곳에 언제나 다툼과 갈등과 시기와 질투와 큰소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지금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1장 10절에서 권면하고 있습니다. “다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1Co 1:10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다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십자가는 자신의 주장, 자신의 생각과 뜻을 내려놓게 하고 하나되게 합니다.
십자가는 육신의 죄로부터 자유케 하며, 주님의 성품을 닮아가게 합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의지하고 십자가를 경험할 수록 우리는 죄로부터 자유케 됩니다. 십자가는 다툼과 갈등이 아니라 같은 말,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하나됩니다. 십자가는 시기와 질투로 다투는 것이 아니라 이해와 사랑으로 하나되게 합니다. 십자가는 결국 우리를 점점 예수님을 닮아가게하며 구원의 능력과 은혜를 누리게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참된 변화를 경험하기 원하십니까? 참된 자유와 승리를 경험하기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십자가를 날마다 개인적으로 경험하고 적용하시기 바랍니다. 십자가의 능력을 오늘 경험하기 위해서
먼저 롬 Rom 6:11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나의 죄에 대해 죽은 자요 하나님에 대해서는 산 자로 여기세요.
Rom 6:13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의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나의 생각과 마음과 시간을 의의병기로 주님께 드리세요. 첫 생각을 주님께 드리세요. 말씀과 기도로 주님과 친밀하게 교제하세요.
Gal 2:20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이제 내가 갖고 있는 인간적인 생각, 계획, 염려 내 내려놓으세요. 예수님이 주권자되시는 주인이심을 인정하세요. 그리고 죄성인 지닌 내 자아가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아 죽었고, 이제는 예수님이 내 삶의 주인임을 선포하세요. 그 때 부활의 주님이 내 마음과 삶을 통치하고 다스리게 될 것입니다. 십자가의 능력으로 새힘과 능력으로 힘찬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두번째로 오늘 우리가 경험해야 할 십자가의 능력은 바로 사명을 감당하기 위한 능력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제자로 살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 가야 합니다.
십자가를 개인적으로 경험하면서 자기를 부인할 때 우리는 기쁨과 자원함으로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게 됩니다.
십자가는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치러야 할 댓가와 희생입니다.
우리 모두는 가능하면 넓은 길, 편한 길, 고통이 없는 길로 가길 원합니다. 그러나 때로 주님은 나를 통해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좁은 길로 가면서 댓가와 희생을 요구하실 때가 많습니다. 바로 그 길이 십자가의 길이며 사명의 길입니다. 언제 어떻게 내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갈 수 있습니까? 바로 자신이 부인되어야 합니다. 내 욕심, 내 생각, 내 계획이 포기되어야 나를 향한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우리는 희생하고 댓가를 지불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나를 죽이며 십자가를 지고 갈 때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결국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주님처럼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명의 삶을 위해 주님처럼 자기부인의 동산인 겟세마네 기도의 동산에 날마다 올라가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는 삶이 오늘 능력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십자가의 말씀이 멸망하는 사람들에게는 미련하게 보일 뿐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말씀은 구원얻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토마스 아 켐피스의 글 “그리스도를 본받아”에 이런 글이 있다. “그리스도인은 십자가에서 도망칠 수는 없다. 십자가를 피한다면 이미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가 아니다. 그대가 밖으로 도망쳐도 거기 십자가가 있고, 안으로 숨어도 거기 십자가를 볼 것이다. 위로 올라가도 십자가가 기다리고, 밑으로 파고들어도 십자가가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십자가없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상상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십자가의 말씀이 어리석게 보입니까? 아니면 십자가를 통해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까? 오늘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음을 믿고 선포함으로 십자가의 능력을 체험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혼탁한 마지막 시대에,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신실한 예수님의 제자로 사시는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