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의 능력으로 가능한 산상수훈의 삶
부활의 능력으로 가능한 산상수훈의 삶
(마 5:2-10, 7:21-27)
한국의 문화부장관을 역임하며 ‘최고의 지성’으로 불렸던 이어령 교수는 노년에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그리스도인이 되기까지 가장 큰 걸림돌이 있었는데, 바로 예수님의 산상수훈이었습니다.
그는 인문학적 시각으로 성경을 읽으며 깊은 충격과 거부감을 느꼈습니다. “오른뺨을 치면 왼뺨을 돌려대라고? 어떻게 원수를 사랑할 수 있단 말인가?” 공자나 맹자의 가르침은 노력하면 흉내라도 낼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산상수훈은 단 1밀리미터도 인간의 힘으로는 넘을 수 없는 거대한 벽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산상수훈은 바로 우리가 누구인지를 보여 주는, 그리스도인의 헌법과 같은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누릴 수 있는 축복이 무엇인지, 우리가 어디를 향해 나아가야 하는지, 세상과 어떻게 다르게 살아야 하는지, 무엇을 위해 달려가야 하는지를 선명하게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원수를 사랑하며,마음으로 음욕을 품지 아니하며 먼저 하나님 나라를 구하며, 하늘 아버지께 기도하며 나아가는 이러한 삶이 가능하다고 믿으십니까? 우리는 세상사람들이 절망하며 불가능하다고 여기는 산산수훈의 삶이 가능할까요?
예수님은 죽음과 죄를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 부활하신 주님이 우리 안에 사십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 부활의 능력으로 하나님이 허락하신 초자연적이고 풍성한 산상수훈의 삶을 바로 이 자리에서 살아내는 은혜가 여러분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1. 산상수훈은 축복입니다 — 하나님 나라 백성의 복된 삶
주님은 우리가 축복받기를 원하시고, 잘되기를 원하시며, 행복하기를 원하십니다. 산상수훈을 시작하시면서 주님은 무려 여덟 번에 걸쳐 복된 성품을 말씀하십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세상 사람들은 물질적 풍요나 환경적 어려움의 부재를 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인격적이고 영적이며 관계적인 참된 복을 말씀하십니다. 팔복은 성품에 관한 말씀입니다. 성품이 변하면 나머지 산상수훈의 삶이 가능해집니다. 겸손하고 온유한 성품으로 변화되면, 겸손하고 온유한 삶을 살게 됩니다.
‘복이 있나니’는 헬라어로 **‘마카리오스’(Makarios)**입니다. 이 단어는 사람의 행복이 아니라, 하나님의 행복을 가리킬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심령이 가난하고 애통하며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할 때, 그 행복은 하나님이신 예수님 자신의 행복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주님의 마음에는 이런 뜻이 담겨 있습니다. ‘내가 누리는 이 행복을 너희도 항상 경험하며 살기를 바란다.’
여기서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중요한 진리가 있습니다. 팔복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지닌 성품입니다. 세상 사람과 구별되는 성품이요, 거듭난 자의 성품이며, 오직 성령께서 만들어 가시는 내면적이고 영적인 성품입니다. 이 여덟 가지 성품은 성령과 말씀으로 거듭난 사람만이,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난 사람만이 닮아 갈 수 있는 주님의 성품입니다.
마카리오스의 복을 누리기를 원하십니까? 매일 아침 이렇게 선포하십시오. “나는 십자가에서 죽었고, 내 안에 예수님이 왕으로 사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간절히 구하십시오. “성령님, 순간순간 제 마음과 의지와 감정을 통치해 주세요.” 성령께서 우리 마음의 보좌를 차지하실 때, 비로소 주님의 성품이 우리 인격이라는 열매로 맺히기 시작합니다.
세상은 환경이 바뀌어야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가 주님을 닮을 때 행복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성품으로 빚어짐으로써 하늘의 축복을 마음껏 누리는 성도님들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2. 산상수훈은 성품에서 시작됩니다
산상수훈의 팔복은 단순한 도덕적 교훈이 아닙니다. 이것은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이루어 가시는 실제적인 변화의 이야기입니다. 내면이 변하면 이웃과의 관계가 변하고, 마침내 하나님과의 관계가 열립니다.
첫째, 부활의 능력은 우리의 내면을 변화시킵니다
1) 심령이 가난한 자 (마 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헬라어로 ‘가난’은 **‘프토코스’(Ptōchos)**입니다. 단순히 가난한 상태가 아니라, 남의 도움 없이는 단 하루도 살 수 없는 거지의 상태를 뜻합니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 내세울 의가 전혀 없고, 스스로를 구원할 능력이 조금도 없음을 인정하는 영적 겸비함입니다. 영적파산상태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내면이 완전히 비워졌기에,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만을 갈망하며 그분께만 매달리는 상태입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 이 순간 자신이 얼마나 영적으로 절대적인 가난뱅이인지 깨닫고 계십니까? 바로 그 가난한 심령 위에 하나님 나라가 임합니다. 심령의 가난이 천국 문을 여는 유일한 열쇠입니다.
2) 애통하는 자 (마 5: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심령이 가난해지면 무엇이 보입니까? 자신의 실상이 보입니다. 지성, 외모, 배경으로 가득했던 가짜 자부심이 성령의 빛 앞에서 산산이 무너집니다. 내 안에 선한 것이 없으며 오직 죄와 허물뿐임을 깨닫는 순간, 사랑하는 이를 잃은 듯한 극심한 슬픔으로 내면이 완전히 해체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성령님께서 고통스럽게 내 죄를 깨닫게 하시고 울게 하십니다.
그런데 이 애통은 나 자신에게만 머물지 않습니다. 내 안의 거대한 죄악을 본 사람은 이제 타인의 허물을 손가락질하지 않습니다. 손가락질하던 손이 가슴을 치는 손이 됩니다. 형제의 죄가 곧 나의 고통이 되는 중보적 애통의 마음이 생겨납니다. 이렇게 애통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용서와 위로를 부어 주십니다.
3)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마 5: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이 굶주림은 단순한 배고픔과 목마름이 아닙니다. 누가복음 15장의 탕자가 쥐엄 열매조차 없어 굶어 죽어가다 아버지를 찾는 그 절박함입니다. 목이 타들어가 입천장이 달라붙는 듯한 고통으로 하나님의 의를 갈망하는 상태입니다.
내면의 가난과 애통을 통과한 성도는 이제 죄의 세력에서 완전히 해방되어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삶의 모든 영역에서 주님을 닮아 가고자 몸부림칩니다.
지금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를 닮고 싶은 타는 목마름이 있습니까? 그것은 이미 내 안에 부활의 생명이 역사하고 있다는 가장 분명한 증거입니다.
둘째, 부활의 능력은 이웃과의 관계를 변화시킵니다
내면이 변화된 사람은 결코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이웃을 대할 수 없습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역사하실 때, 남편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고 자녀를 대하는 방식이 달라집니다. 관계의 방식 자체가 변화됩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 (마 5: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긍휼은 히브리어로 ‘헤세드(Chesed)’, 단순한 동정심이 아닙니다. 죄로 인해 죽어가는 영혼을 다시 살려내는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인인 우리를 불쌍히 여겨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신 바로 그 사랑입니다.
진정한 긍휼은 감정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직접 다가가 상처를 싸매고 비용을 지불하는 구체적인 행동으로 이어집니다. 성령님은 바로 이 긍휼의 마음을 우리 안에 부어 주십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이웃을 판단하지 않으며, 먼저 섬기는 마음이 성령께서 우리 안에 만들어 가시는 열매입니다.
셋째, 부활의 능력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열어 줍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마5:8)
두 마음이 아닌 오직 한 마음으로,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청결한 마음은 하나님을 보는 축복을 누립니다. 여기서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마음 깊은 곳에서 하나님을 느끼기 시작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느껴지고,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며, 하나님의 마음이 전달되기 시작합니다. 그때 자유와 평강과 기쁨이 우리를 감싸며, ‘하나님이 내 안에, 내가 하나님 안에’ 있는 놀라운 연합을 경험하게 됩니다.
나아가 성령께서는 우리를 어떻게든 화평을 만들어 가는 사람으로 살게 하시고, 더 나아가 예수님을 위해 핍박받는 자리까지 나아가게 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팔복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존재가 바뀌면 삶이 바뀐다고. 그리고 이 성품의 변화는 오직 부활의 영이신 성령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여러분에게 지금 말씀드린 팔복의 성품을 누리고 계십니까? 부활의 주님께서 여러분을 통치하는 만큼 주님의 성품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성품으로 변화되는 만큼 주님의 행복, 축복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통치를 사모하십시오. 그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옷 입어, 오늘 만나는 모든 이웃에게 부활의 생명을 흘려보내는 복된 통로가 될 것입니다.
3. 산상수훈은 친밀함 속에서 가능한 삶입니다 (마 7:21–27)
지금까지 우리는 산상수훈의 삶이 오직 성령의 통치를 받을 때 가능하다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팔복의 성품으로 내면이 변화되고, 이웃과의 관계가 새로워지는 놀라운 은혜를 함께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 긴 설교를 마무리하시면서 사랑의 마음으로 한 가지 엄중한 경고를 더하십니다.
첫째, 주님은 형식적인 신앙을 경고하십니다 (21–23절)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1절)
이 말씀은 충격적입니다. 예배의 자리에 나오고, 기도하고, 심지어 주의 이름으로 예언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많은 권능을 행한 자들을 향해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둘째, 친밀함이 순종을 낳고, 순종이 반석을 세웁니다 (24–27절)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24절)
산상수훈의 결론으로 주님이 강조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아는 것도, 듣는 것도 아닙니다. 실제로 이렇게 살라는 것입니다. “듣고 행하는 자”로 살라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삶이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인생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답게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습니까? 그 비결을 23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23절)
I never knew you!
기도도 있었고, 봉사도 있었고, 심지어 능력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과의 관계는 없었습니다. 여기서 ‘안다’는 것은 히브리적 표현으로, 머리로 아는 지식이 아니라 인격적이고 친밀한 관계를 의미합니다. 왜 이런 열심과 행함이 있었는데 불법이 되었을까요? 그 결정적인 이유가 주님과 친밀함없는 열심때문이었습니다. 주님과의 인격적인 관계 없이 열심히 귀신도 쫓아내고 권능도 행했지만, 그것은 결국 내 뜻대로 행하는 불법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과의 인격적인 교제 없이 열심히 살고 열심히 사역하는 것만큼 위험한 것은 없습니다.
남편과 아내가 함께 살며 서로를 알아가듯, 우리도 기도와 말씀을 통해 주님과 친밀히 교제할 때 주님의 뜻이 분별됩니다. 마리아처럼 주님의 발 앞에 앉아 그분의 말씀으로 교제하고, 기도로 독수리 날개 치듯 새 힘을 얻을 때, 우리는 기쁨으로 산상수훈의 삶을 살아낼 수 있게 됩니다.
여러분의 삶의 최우선순위가 말씀과 기도로 드리는 주님과의 친밀한 교제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우리의 삶은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으로 세워질 것입니다.
마지막 심판의 날 모든 것이 주님 앞에 드러날 것입니다. 주님과 친밀한 교제 속에서 말씀을 듣고 순종하며 세운 삶만이,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께 인정받는 삶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이 모래 위에 세운 인생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나의 간증: 친밀함이 바꾼 인생
저는 미국에서 사역하던 시절, 신분 변경의 과정에서 교회의 어려움과 재정적 위기가 겹쳐 인생에서 가장 어두운 터널을 지나야 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 무렵 국제기도의 집 기도실에서 6개월훈련받는 시간이있었습니다. 주일 아침에 기도하던 중이었습니다. 찬양팀은 아가서의 가사로 주님의 사랑을 노래하고 있었고, 저는 아가서 4장을 펴서 읽으며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주님의 마음이 느껴졌습니다. 말씀 구절구절을 통해 주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다니엘아, 내가 너를 얼마나 기뻐하는지 아니? 너는 흠이 없단다. 내가 너 때문에 마음을 빼앗겼단다.” 동시에 스바냐 3장 17절 말씀이 마음을 가득 채웠습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그 순간, 사역의 문제와 재정의 무게와 박사논문의 부담감이 눈 녹듯 사라졌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기쁨과 자유함이 마음속에서 솟아올랐고, 저도 모르게 감격의 눈물이 흘렀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제 마음에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너를 사역 때문이 아니라, 나의 신랑으로 사랑의 교제를 위해 불렀다.”
그 이후, 제 삶의 우선순위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사역보다 주님과의 친밀함이 먼저가 되었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미국에서 단독 건물로 교회 개척을 허락하셨고, 이후 우리 가정을 러시아 선교지로 인도하셨습니다. 전혀 계획하지 않았던 이곳 로스토프로의 부르심도, 주님과의 친밀한 교제 속에서 주신 방향이었습니다. 돌아보면 모든 사역의 걸음마다 주님과의 친밀함이 그 시작이었습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가 함께 살펴본 산상수훈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산상수훈은 하나님 자녀가 누릴 수 있는 축복된 삶입니다. 부활의 능력으로 사는 하나님의 자녀는 원수를 사랑하며 하나님 나라를 먼저 구하며 하늘아버지께서 기도하는 이런 삶을 살아낼 수 있음을 믿으십니까?
산상수훈은 세상사람이 살아낼 수 없지만 자녀는 당연히 살아야 할 정체성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성품의 변화에서 시작됩니다. 그리고 산상수훈은 오직 주님과의 친밀함 속에서 살아낼 수 있는 삶입니다. 주님을 알면 그분의 뜻이 보입니다. 그분의 뜻이 보이면 순종할 힘이 생깁니다. 그리고 그 순종의 삶이 쌓일 때, 어떤 폭풍도 무너뜨릴 수 없는 반석 위의 집이 세워집니다.
매일 주님 앞에 나아가십시오. 그분의 말씀 앞에 앉으십시오. 그분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오늘 이 땅에서 부활의 능력을 성품과 삶으로 증명해내는, 반석 위에 세워진 복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살아계신 주님,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들이 살아낼 수 있는 산상수훈의 삶이 축복임을 감사합니다.
우리안에 거하하시는 부활의 영이신 성령께서 온전히 나의 마음을 통치함으로 팔복의 성품으로 변화시켜주소서. 내 성품이 변화됨으로 주님의 행복과 축복을 누리며 살게 하소서.
주님의 성품으로부터 긍휼을 베풀며, 원수마저 사랑하며 음욕을 품지 않는 변화된 삶을 살게 하소서.
무엇보다 말씀을 듣고 행하는 반석위에 집을 짓는 지혜로운 자가 되게 하소서. 이를 위해 주님과의 친밀함이 나의 삶의 최우선이 되게 하소서.
매일 말씀 앞에 앉아 주님의 음성을 듣고, 그 음성이 우리 삶의 모든 걸음을 이끌게 하소서.
어떤 폭풍이 와도 흔들리지 않는 삶으로 이 땅에서 부활의 능력을 증명하는 주의 백성이 되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