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신도 믿는다(야고보서 2:14-26)
오늘 한 가지 질문을 드립니다.
“당신은 예수님을 믿으십니까?”
이 자리에 계신 분들 대부분은 망설임 없이 “네”라고 대답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야고보는 우리 마음을 불편하게 만드는 말씀 하나를 던집니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약 2:19)
귀신도 믿습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압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압니다. 심지어 두려워 떨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귀신은 영원히 멸망합니다.
야고보의 편지를 받은 사람들은 불신자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고 예배를 빠지지 않는 성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믿음은 그들의 삶을 변화시키지 못했습니다. 굶주린 형제에게 “평안히 가라” 한마디만 하고 돌아섰습니다. 입술로는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같은 입으로 형제를 저주했습니다. 믿는다고 말했지만, 삶은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야고보는 그것을 가리켜 “죽은 믿음”이라고 선언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솔직하게 자신을 돌아보시십시오? 내 믿음은 예배당 안에서만 작동하고, 문을 나서는 순간 사라지는 믿음은 아닙니까? 오늘 저와 우리 모두는 말씀 앞에 마음을 열고, 내 믿음의 실제를 정직하게 마주하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 귀신도 믿는 수준의 믿음
야고보서를 받아 읽었던 성도들은 로마 제국 전역에 흩어져 살던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고, 매주 회당에 모여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야고보는 왜 이들에게 이토록 강한 어조로 편지를 썼을까요?
그들에게는 치명적인 문제가 있었습니다. 믿는다고 말했지만, 그 믿음이 삶에 변화를 가져오지 못했습니다.
당시 바울의 복음,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진리가 퍼져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일부 성도들이 이 귀한 진리를 심각하게 왜곡하기 시작했습니다. “행위는 필요 없다. 믿기만 하면 된다.” 이 논리는 무책임한 신앙생활을 합리화하는 도구로 전락해버렸습니다.
그 결과는 처참했습니다. 공동체 안에서 가난한 형제가 헐벗고 굶주려도 말 한마디만 던지고 돌아서는 성도가 있었습니다. 예배당 안에서는 부유한 자에게 좋은 자리를 내어주고 가난한 자는 바닥에 앉히는 노골적인 차별이 벌어졌습니다. 혀로는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같은 혀로 형제를 저주하는 이중적인 삶이 만연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스스로를 믿는 자라고 여겼습니다.
바로 여기서 야고보는 날카로운 말씀을 던집니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약 2:19)
귀신들은 하나님이 한 분이심을 압니다. 머리로, 지식으로 압니다. 심지어 그 사실 앞에 두려워 떨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그 앎이, 그 떨림이 귀신을 조금도 변화시키지 못했습니다. 귀신은 여전히 귀신입니다.
당시 성도들의 모습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알고, 성경을 암송하고, 예배당에 출석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삶을 조금도 바꾸지 못했습니다. 머리의 지식이 가슴을 거쳐 손발로 내려오지 못한 것입니다. 야고보는 그것을 **”죽은 믿음”**이라고 선언합니다(약 2:17).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어야 합니다. 나의 믿음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예수님에 대해 지적으로 동의하는 차원의 믿음입니까? 아니면 믿음이 내 삶 속에서 살아 숨쉬고 있습니까?
2. 살아있는 믿음이란 무엇인가
바른 믿음을 이해하라
그렇다면 야고보가 말하는 살아있는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당시 성도들이 “예수님을 주(κύριος)로 고백한다”고 말했을 때, 그 고백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 알아야 합니다. 유대인에게 ‘주’라는 호칭은 구약에서 하나님 야훼(YHWH)를 부르는 말과 동등한 표현이었습니다. 그 당시 로마황제를 향해 주라고 고백할 때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향해 주로 고백함으로 죽음의 위기를 당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주로 고백한다는 것은, 그분이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내 삶의 절대적인 주권자이심을 인정하고 그분께 전적으로 순종하겠다는 선언이었습니다.
야고보는 자신을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δούλος)”이라고 소개합니다. 종은 노예입니다.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는 순간, 나는 그분의 종이 됩니다. 내 삶의 주인 자리가 바뀌는 것입니다.
여러분, 마음의 의자를 기억하십니까? 지금 내 마음의 의자에 누가 앉아 있습니까? 내가 앉아 있습니까, 아니면 예수님이 앉아 계십니까? 살아있는 믿음은 그 의자에서 내가 내려오고 예수님을 주인으로 앉히는 것입니다. 말로만 “주님”이라 부르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내 삶의 결정권과 주도권을 예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롬 10:9)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믿음을 더욱 깊이 이해하려면 갈라디아서 2장 20절 말씀 앞에 서야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갈 2:20)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행위의 주체가 바뀌는 것입니다. 이제 사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안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입니다.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예수님은 포도나무요, 우리는 가지입니다. 가지는 열매를 맺기 위해 스스로 발버둥치지 않습니다. 뿌리에서 올라오는 생명의 진액이 가지를 통해 흘러 저절로 열매를 맺습니다. 내 안에 오신 예수님의 생명이 내 삶을 통해 흘러나올 때, 비로소 살아있는 믿음의 열매가 맺히는 것입니다. 믿음은 내 안에 계신 예수님이 행하게 하는 것입니다. Let Jesus do!
내가 예수님을 믿는가? 믿음안에 있는가 물을 때 두 가지를 꼭 기억하세요. 마음의 의자 그림과 포도나무 그림입니다.
따라서 행함은 내가 이를 악물고 만들어내야 할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 살아 있으면 저절로 맺히는 열매입니다.
보는 눈이 달라진다 — 가치관의 변화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영접한 사람에게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당시 공동체 안에서 화려한 옷을 입은 부자는 좋은 자리로 안내하고, 남루한 옷의 가난한 자는 바닥에 앉혔습니다. 외모와 지위와 소유로 가치를 매기는 세상의 눈입니다. 그러나 야고보는 선언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으로 받게 하지 아니하셨느냐”(약 2:5). 하나님의 눈은 세상의 눈과 다릅니다.
예수님이 내 안에 오시면, 부자도 가난한 자도, 높은 자도 낮은 자도, 모두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동등하고 존귀한 존재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내가 사람을 볼 때 무엇이 먼저 보입니까? 그 사람의 능력과 재산이 먼저 보입니까, 아니면 그 사람의 영혼과 존귀함이 먼저 보입니까? 보는 눈이 바뀌는 것, 그것이 살아있는 믿음의 첫 번째 증거입니다.
사랑의 사람으로 변화된다 — 최고의 율법
나아가, 살아있는 믿음으로 거듭난 사람은 사랑의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야고보는 이것을 **”최고의 율법”**이라고 부릅니다.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하라”(약 2:8). 그런데 이 사랑은 명령으로 억지로 짜내는 것이 아닙니다. 갈라디아서 5장 6절은 말합니다.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믿음으로 사랑의 본체이신 분이 내 안에 들어오셨기 때문에 사랑이 가능해진 것입니다.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요일 4:8)
억지로 이를 악물고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안에 오신 예수님의 사랑이 나를 통해 이웃에게로 흘러가는 것입니다. 헐벗고 굶주린 형제를 만났을 때, 살아있는 믿음을 가진 사람은 말만 던지고 돌아서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눈으로 그 형제를 보고, 예수님의 마음으로 품고, 예수님의 손으로 돕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살아있는 믿음은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내 마음의 의자에서 내가 내려오고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것,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예수님이 사시도록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그 믿음이 살아있을 때, 우리의 눈이 바뀌고, 우리의 가치관이 바뀌고, 우리의 삶이 사랑으로 채워지기 시작합니다. 그것이 바로 야고보가 말하는 살아있는 믿음입니다.
3. 살아있는 믿음을 행위로 보여라 — Let Jesus do it. Do it by faith!
믿음은 반드시 행위로 나타나야 한다
야고보는 2장 26절에서 선언합니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신조를 외우고, 성경을 암송하고, 예배당에 앉아 있어도 삶으로 나타나지 않는 믿음은 영혼 없는 시신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야고보는 두 사람을 나란히 세웁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방인 기생 라합. 이 둘을 함께 세우는 이유는 하나입니다. 살아있는 믿음은 신분과 배경을 가리지 않고 반드시 행위로 증명된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 — 하나님은 약속의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 명령하셨습니다. 인간적으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명령이었지만, 아브라함은 순종했습니다.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약 2:22). 죽음 너머의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이 그의 발을 모리아 산으로 향하게 했습니다.
라합 — 여리고의 기생 라합은 발각되면 목숨을 잃을 상황에서도 이스라엘 정탐꾼들을 숨겨주었습니다. “여호와 너희 하나님은 하늘에서도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니라”는 고백이 죽음을 무릅쓴 행동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 결단은 가족을 살렸고, 라합은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이름을 올리게 됩니다(마 1:5).
두 사람 모두 불가능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살아있는 믿음은 그 불가능을 넘어서게 했습니다.
내 안의 주님이 하시게 하라
저는 오랫동안 남자는 부엌에 들어가지 않는 문화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최근에도 한국에서 설거지를 도우려다 누님에게 부엌에서 쫓겨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아내는 오래전부터 남편이 음식을 만들어주고 설거지하는 것을 원해왔습니다. 설거지는 가정교회를 하면서 본격적으로 섬기게 되었고, 아내가 그토록 원했던 음식 만들기는 최근 에스토니아에서 오트밀을 만드는 것을 제 일과로 삼으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솔직히 처음에는 내면의 저항감이 있었습니다. 안 하던 일이라 불편했습니다. 그런데 그 불편한 마음을 주님 앞에 내려놓았을 때, 주님께서 아내를 섬기고 싶은 마음과 기쁨을 함께 부어주셨습니다. 이제 매일 아침 오트밀을 만드는 그 시간이, 내가 만들지만 주님이 하시는 섬김이 되었고, 감사와 기쁨이 되었습니다.
행함은 의무가 아닙니다. 사랑이 안에서 흘러넘칠 때, 자연스럽게 손이 움직이는 것입니다.
내 안의 주님이 하시는 용서:
마지막으로 유명한 코리 텐 붐 이야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수용소에서 가족을 잃고 온갖 고초를 겪었던 코리 텐 붐 여사의 이야기입니다. 전쟁이 끝난 후, 그녀는 독일 뮌헨의 한 교회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를 전하고 있었습니다. 설교가 끝난 후, 한 남자가 다가왔습니다. 그는 바로 수용소에서 그녀의 언니를 죽게 하고 자신을 고문했던 바로 그 간수였습니다.
그는 손을 내밀며 물었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이 모든 죄를 용서하신다고 했습니다. 저 같은 사람도 용서받을 수 있을까요?” 코리 텐 붐 여사는 순간 얼어붙었습니다. 증오가 치밀어 올랐고, 도저히 그 손을 잡을 수 없었습니다. 그녀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습니다. “주님, 저는 할 수 없습니다!”
그때 그녀는 깨달았습니다. 내 힘으로는 1센티미터도 움직일 수 없지만, 내 안에 계신 예수님께 순종하기로 선택할 수는 있다는 사실을. 그녀가 떨리는 마음으로 “주님, 제 감정은 아니지만,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손을 내밉니다“ 라고 고백하며 손을 내미는 순간, 어깨에서부터 손끝까지 뜨거운 강물 같은 예수님의 사랑이 흘러나가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그의 손을 잡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형제여, 당신을 용서합니다.”
성도 여러분, 내 안의 생명이 역사하면 내 감정으로는 도저히 못 할 용서도 가능해집니다. 마음의 의자에 주님이 앉아 계시면, 주님의 손이 내 손을 움직여 원수의 손을 잡게 하십니다. 그것이 살아있는 믿음의 능력입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귀신이 믿는 그런 지적 동의 수준의 믿음입니까? 아니면, 예수님을 내 마음과 삶의 왕으로 모신 믿음을 갖고 있습니까? 사도 바울처럼,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아브라함처럼, 라합처럼, 불가능한 순간에도 순종하며 살 수 있을까요?
그것은 오직 믿음으로 가능합니다.
포도나무 되신 주님께 꼭 붙어 있으십시오. 마음의 의자에 순간순간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십시오. 순간순간 주님이 나를 통해 말하시고, 나를 통해 행하시도록 내어드리십시오.
그리하면 나의 가족이, 나의 친구가, 나의 행함을 통해 내 안에 계신 주님을 보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믿음이 행함으로 드러나기를 원하십니다. 내 안에 계신 주님이 행하게 하십시오. 내 안에 계신 주님의 사랑이 나의 말로, 나의 용서로, 나의 섬김으로 — 가정에서, 직장에서, 이웃에게 흘러가는 은혜가 여러분 모두에게 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마무리 기도문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
오늘 우리는 “귀신도 믿고 떠느니라”는 말씀 앞에 우리 자신의 민낯을 정직하게 마주합니다. 하나님을 머리로만 알고, 입술로만 주님을 부르며, 정작 삶의 현장에서는 여전히 내가 주인 되어 살았던 지난날을 회개합니다.
주님, 관념 속에 갇힌 ‘죽은 믿음’에서 우리를 건져 주시옵소서. 예배당 문을 나서는 순간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잊어버리는 무기력한 신앙에서 우리를 깨워 주시옵소서.
이제 결단합니다. 내 마음의 의자에서 내가 내려오고, 오직 주님만을 내 삶의 주인으로 모셔 들입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는 고백이 우리의 실제가 되게 하옵소서.
내 의지로 짜내는 행함이 아니라, 포도나무 되신 주님께 붙어 있어 흘러나오는 사랑의 열매가 맺히기를 원합니다.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이를 용서하게 하시고, 작은 일에도 주님이 주시는 기쁨으로 기꺼이 섬기게 하옵소서.
오늘 이 문을 나서는 우리의 발걸음이 순종의 발걸음이 되게 하시어, 우리의 삶을 통해 세상이 내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게 하옵소서.
우리를 죽기까지 사랑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