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 위장된 축복(약1:1-8)
성공한 사람들의 공통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들은 위기(Crisis)를 기회(Opportunity)로 바꾸는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영적인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의 거장들은 고난이 닥칠 때 당황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고난이 곧 ‘하나님의 업그레이드 신호’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시련’을 기쁘게 여기라고 명령합니다. 여기서 ‘시련’은 금의 순도를 높이기 위해 뜨거운 불속에 집어넣는 과정을 뜻합니다. 즉, 여러분의 삶에 불 같은 시험이 찾아왔다는 것은, 지금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정금’으로 만드시기 위해 특별 관리 단계에 들어가셨다는 뜻입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우리 삶의 불순물을 태우고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빚어가시는 하나님의 ‘위장된 축복’에 대해 나누고자 합니다. 만약 지금 고난 속에 계시다면 기대하십시오. 하나님은 지금 당신의 인생을 정금으로 빚고 계십니다.
1. 시련을 기쁘게 여기라. 고난이 축복이기 때문.
2절에서 말씀합니다. Jas 1:2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2절과 3절에 비슷한 단어로 시험과 시련이 나옵니다. 러시아 번역처럼 유혹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유혹을 기뻐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야고보서 1장 3절에서 ‘시련’으로 번역된 헬라어 **’도키미온(δοκίμιον)’**은 금이나 은을 뜨거운 불꽃 속에 집어넣어 불순물을 제거하고 그 순도를 확인하는 과정을 뜻합니다.
우리가 당하는 고난은 우리를 넘어뜨리려는 사단의 유혹(Temptation)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 안에 섞여 있는 죄와 세상의 찌꺼기를 태워버리고, 우리의 믿음이 진짜임을 입증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단련(Testing)**입니다. 고난은 우리의 믿음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진짜 그리스도인임을 정금처럼 증명해 내는 도구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야고보는 우리에게 충격적인 권면을 합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약 1:2). 고난을 피하라는 것도, 견디라는 것도 아닌 ‘기쁘게 여기라’는 이 말씀은 도대체 누구에게 하시는 말씀입니까?
야고보서는 40년대에 쓰여진 비교적 가장 초기 문서중 하나입니다. 야고보가 편지를 보낸 ‘흩어진 열두 지파’는 스데반의 순교 이후 예루살렘에 불어닥친 거센 핍박의 칼날을 피해, 오직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정든 고향과 집을 버리고 도망쳐야 했던 ‘신앙 난민(Refugees)’들이었습니다.
오늘날로 치면, 하루아침에 직장을 잃고, 재산을 압류당하고, 가족과 헤어져 연고도 없는 타국으로 몸을 숨긴 디아스포라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야고보서에 나타난 그들이 시험은 다음과 같습니다.
- 첫째, 억울한 경제적 착취와 빈곤이었습니다. 낯선 땅에서 소수자로 살아가던 이들은 부유한 자들에게 무시당하고 압제를 당했습니다. 정당하게 일하고도 품삯을 받지 못해 굶주렸고, 힘 있는 자들에 의해 억울하게 법정으로 끌려가 재산을 빼앗겼습니다(약 5:4, 2:6). 당장 내일 입을 옷이 없고 먹을 양식이 없어 떨고 있는 형제들이 우리 곁에 수두룩했던 상황이었습니다(약 2:15).
- 둘째, 동족과 이방인 모두에게 버림받은 소외였습니다. 이방인들에게는 유대인이라고 조롱받고, 같은 동족인 유대인 회당에서는 ‘예수를 믿는 이단’이라며 매를 맞고 쫓겨났습니다. 그 어디에도 마음 둘 곳 없는 철저한 고립과 핍박이 그들의 일상이었습니다.
- 셋째, 흔들리는 공동체 안의 갈등이었습니다. 외부의 핍박이 거세지자 교회 내부도 흔들렸습니다. 가난한 자들이 차별받고, 부자들이 편애를 받는 세속적인 가치관이 침투했습니다. 서로 비방하고 시기하며 다투는 아픔까지 겹쳤습니다(약 3, 4장).
이토록 처참한 난민의 삶을 사는 이들에게 야고보는 말합니다. “그래도 기뻐하십시오.”
왜입니까? 이 고난이 그들의 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들을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빚어내시는 거룩한 용광로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고난을 기쁘게 여길 이유는 고난 너머에 하나님이 예비하신 ‘참된 축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40년 광야 여정은 고난이 어떻게 축복이 되는지를 보여주는 최고의 모델입니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알려 하심이라” (신 8:2) 광야는 내 힘과 수단이 무너지는 곳입니다. 하나님은 결핍을 통해 우리의 교만을 꺾고 마음의 중심을 하나님께 고정하게 하십니다. 내가 낮아질 때 하나님의 통치가 시작되기에, 고난은 겸손의 축복입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라” (신 8:3) 만나는 단순한 배고픔 해결이 아니라, 인간은 생명의 근원인 ‘말씀’으로 존재함을 가르치는 도구입니다. 고난은 우리를 영원히 흔들리지 않는 말씀의 사람으로 빚어냅니다.
“이 사십 년 동안에 네 의복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부르트지 아니하였느니라” (신 8:4) 결핍의 현장에서 옷과 발을 보호하신 하나님의 손길은 정교했습니다. 고난은 멀리 계신 줄 알았던 하나님이 내 일상 속에 가장 가까이 계심을 체험하는 임재의 축복입니다.
“사람이 그 아들을 징계함 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징계하시는 줄 마음에 생각하고” (신 8:5) 하나님은 심판자가 아닌 ‘아버지’의 마음으로 우리를 훈련하십니다. 고난은 우리가 하나님의 친백성이며, 끝까지 책임지시는 사랑받는 자녀라는 증표입니다.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신 8:16)
결국 고난은 우리를 무너뜨리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하나님이 약속하신 더 큰 복을 담을 수 있는 거룩한 그릇으로 만드시는 하나님의 열심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 앞에 놓인 시련과 고난은 위장된 축복입니다. 그러므로 시련을 온전히 기쁘게 여기길 바랍니다. 하나님이 이 시련을 통해 무슨 축복을 주실려고 하는지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그럼 하나님께서 시련을 통해 주시고자 하는 축복은 무엇일까요?
1. 위장된 축복- 온전한 예수님의 형상회복
3-4절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시련과 고난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하는 축복은 바로 우리의 성품이 주님을 닮은 인격으로 빚어주는 것입니다.
진짜 축복은 환경이 변하고 돈을 많이 버는 것이 아닌가요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참된 축복은 우리 인격이 부족함이 없이 온전하게 변화되는 것이라 말씀합니다.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제육이 집에 가득하고도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잠17:1)
여기서 ‘제육(feasting/заколотого скота)’은 단순히 고기만을 뜻하는 게 아니라, 제사를 지내고 남은 풍성한 고기 잔치를 의미합니다. 아무리 풍족하고 종교적인 모양새를 갖춘 집이라도 서로 다투고 미워한다면, 비록 초라한 마른 빵 한 조각을 먹더라도 마음 편히 웃을 수 있는 집보다 못하다는 뜻이지요. 진짜 행복은 외적환경의 변화나 먹을 것이 많고 물질적으로 풍부한 것보다 비록 초라한 빵 한 조각을 먹더라도 서로 사랑하고 양보하고 축복하는 곳에 있다는 말입니다.
이 잠언의 말씀은 예수님이 마태복음 5장에서 팔복을 말씀하셨듯이, 우리의 인격이 예수님을 닮아갈수록 하늘의 행복과 축복을 누릴 수 있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고난을 통해 우리의 행복을 위해 우리의 성품을 변화시키기 원하십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을 잘 설명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5:3-4)
사도 바울은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할 수 있다고 선포합니다. 어떻게 환난 속에서 즐거워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고난 그 자체 때문이 아니라, 그 고난이 결국 인내를 낳고 그 인내가 우리를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으로 인도하는 통로가 된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연단’에 해당하는 헬라어 ‘도키메(dokime)’는3절에서 이미 살펴본 것처럼 금속을 뜨거운 불에 제련하여 불순물을 제거하고 순도를 높이는 과정을 뜻합니다. 우리는 고난의 불을 통과하며 거칠고 모난 자아가 깎여 나갑니다. 그 뜨거운 시간을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우리 안에는 정금 같은 ‘그리스도의 성품’이 남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연단은 소망(Hope)을 낳습니다. 성품의 변화를 경험한 성도는 더 이상 세상의 썩어질 것에 소망을 두지 않습니다. 고난을 통해 빚어진 성품은 우리로 하여금 눈을 들어 영원한 하나님 나라와 그분의 영광을 바라보게 합니다.
롬8:28은 우리가 잘 알고 좋아하는 성경구절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이 구절에서 선을 이룬다’는 말씀을 세상적인 성공이나 만사형통으로 오해하곤 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선(Good)’은 하나님의 목적인 구원이 내 삶에 성취되는 것입니다. 선이 무엇인지 29-30절에서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Rom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Rom 8: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결국 영화롭게 하시는 ‘구원’의 완성을 위해 지금도 일하고 계십니다. 그 선의 핵심은 바로 우리가 ‘그 아들의 형상(the image of His Son)’을 본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고난을 포함하여 모든 상황을 통해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와 닮게 하십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이 맏아들이 되시고, 우리는 그분의 형제들이 되는 ‘하나님의 거룩한 가족(The Family of God)’을 완성해 가십니다. 이것이 바로 고난을 허락하시면서까지 하나님이 이루고자 하시는 궁극적인 선입니다.
그러므로 질문을 바꾸십시오. “하나님, 왜 저에게 이런 힘든 일이 생깁니까?” (원망과 한탄) 가 아니라, “하나님, 이 연단을 통해 내 안에 어떤 성품을 빚기 원하십니까?” (기대와 순종) 물으십시오.
제육이 가득하며 다투는 집보다 마른 떡 한 조각에도 화목한 마음이 귀하듯, 환경이 변하지 않아도 내 안에 그리스도의 평강이 흐르고 있다면 당신은 이미 가장 큰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고난 속에서도 즐거워할 수 있는 이유는, 그 끝에 정금같이 빛날 당신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나를 빚으시는 주님의 손길에 당신의 삶을 맡기십시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메세지를 나누겠습니다.
3. 축복을 얻는 방법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가장 큰 축복은 때로 우리가 가장 피하고 싶은 ‘고난’이라는 포장지에 싸여 옵니다. 야고보는 이를 ‘위장된 축복’이라 말합니다. 이 축복의 핵심은 우리 인격의 불순물이 제거되고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위장된 축복을 어떻게 실제적인 내 삶의 열매로 바꿀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은 두 가지 명확한 방법을 제시합니다.
축복을 얻는 첫 번째 방법은 “인내(Perseverance)”입니다.
Jas 1:3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Jas 1:4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And let steadfastness have its full effect,
인내가 그 일을 온전히 이루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요, 중간에 포기하거나, 조급하게 벗어나려 하지 않고 과정을 존중하는 태도이며,
인내가 다 이루어질 때까지 방해하지 않는 것입니다.
결국 인내는 그리스도께로의 성숙을 이루는 도구이자 과정 자체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인내는 단순한 참음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며 끝까지 견디는 것”**입니다. 헬라어 **‘휘포모네’**는
아래(hypo)’와 ‘머물다(meno)’의 합성어로, 무거운 압박감이나 시련 아래에서도 도망치지 않고 그 자리를 견고하게 지켜내는 **’능동적인 버팀’**을 뜻합니다.여기의 인내란 무너지지 않고 계속 하나님을 신뢰하는 지속적인 믿음을 말합니다. 도망가지 않고 끝까지 버티는 것입니다.


러시아어 성경(Синодальный перевод)에서는 이를 Терпение(테르페니예)로 번역하지만, 그 본질적인 의미는 영적인 탄력성과 저항력인 Стойкость(스토이코스트, 견고함/불굴)에 가깝습니다.
즉, 성경적 인내란 환경의 압박 속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신뢰를 잃지 않고, 나에게 주어진 사명과 믿음의 자리를 끝까지 지켜내는 역동적인 영적 힘을 의미합니다.
시련이 올 때마다 우리는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됩니다.
하나는 이 시련을 빨리 끝내고 싶은 마음에서 좌절하고 도망할려고 할 수 있고, 아니면, 이 시련이 하나님 손에 달려 있음을 알고 인내를 지속함으로 예수님의 인격을 닮아가는 길에 설 수 있습니다.
우리는 고난이 찾아오면 본능적으로 ‘탈출’을 꿈꿉니다. 하지만 야고보는 우리에게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고 권면합니다. 이 말의 실제적인 적용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지금 그 시련의 현장에서 도망가지 마십시오”라는 것입니다.
피하는 것은 해결책이 아닙니다. 많은 성도가 공동체 안에서, 혹은 목장에서 관계의 어려움을 겪으면 너무나 쉽게 “목장을 옮겨달라”고 말합니다. 부부 사이에 깊은 갈등이 찾아오면 성급하게 “이혼”을 떠올리며 관계의 단절로 문제를 해결하려 합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이 내게 허락하신 환경에서 도망치는 것은 성장을 포기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 갈등과 스트레스라는 ‘무거운 짐’ 아래에 머물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그 고통스러운 무게 아래 머물러 있을 때에야 비로소 우리 안의 딱딱한 교만이 깨지고, 거친 성품이 깎여나가며, 주님의 온유한 성품이 우리 안에 자리 잡게 되기 때문입니다.
영적 근육은 ‘한계점’에서 자랍니다. 피트니스 센터에서 근육을 키우는 원리를 생각해보십시오. 내 몸에 가볍고 편안한 무게만 들어서는 결코 근육이 생기지 않습니다. 근육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이 느껴지는 무게, 내 힘으로는 버겁다고 느껴지는 그 ‘한계점의 무게’를 들고 버틸 때 비로소 근육은 성장합니다. 영적인 원리도 이와 같습니다. 편안하고 순탄한 삶은 우리를 안주시킬 뿐, 우리를 예수 닮은 사람으로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이라는 ‘영적인 고중량’ 아래서 신음하며 견디는 법을 배울 때, 비로소 우리의 영적 근육이 단단해지고 하나님의 형상이 우리 삶에 새겨집니다.
인내의 끝에서 만나는 축복 인내는 단순히 ‘참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이 이루어질 때까지 ‘그 자리에서 버티는 영적 실력’입니다. 지금 겪고 계신 그 관계의 아픔, 가정의 위기, 삶의 무게가 너무나 고통스럽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을 주님의 형상으로 빚기 위해 허락하신 ‘거룩한 무게’입니다. 도망치지 않고 그 무게를 인내로 받아낼 때, 여러분은 이전보다 훨씬 강인하고 아름다운 하나님의 사람으로 우뚝 서게 될 것입니다.
인내와 함께 반드시 필요한 것이 바로 “지혜(Wisdom)”입니다.
Jas 1: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Jas 1:6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시련을 통과할 때 필요한 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하나님께 구하라고 말씀합니다. 기도해서 이 시련과 고난을 극복할 수 있는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믿음으로 구하고 두 마음을 품지 말고 믿음으로 구할 때 이 기도가 인내의 연료가 됩니다. 하나님은 꾸짖고 않고 후히 주시겠다고 약속하고 계십니다.
시련 속에서 ‘왜(Why)’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묻기보다, 이 시련을 통해 ‘무엇을(What)’ 배우고 어떻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것인지 묻는 것이 지혜입니다.
여기서 지혜는 일반적인 지식이 아니라,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인내를 온전하게 이룰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합니다.
기도를 통해 얻는 지혜는 시련을 하나님의 관점으로 바라보게 하는 ‘영적인 안목’입니다. 지혜가 임하면 고난은 더 이상 나를 무너뜨리는 ‘심판’이 아니라, 나를 빚으시는 ‘사랑의 손길’로 해석되기 시작합니다.
시련의 의미가 해석될 때 고난은 비로소 축복이 됩니다. 지혜는 우리로 하여금 고난 뒤에 숨겨진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을 발견하게 합니다. “이 시련을 통해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변화시키려 하시는가?”를 깨닫는 순간, 우리는 원망을 멈추고 감사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기도로 얻은 지혜는 시련을 견디는 힘을 넘어, 시련을 다스리는 권능이 됩니다.
우리가 기도를 통해 얻어야 할 ‘하늘의 지혜’가 무엇인지 가장 잘 보여주는 인물이 바로 요셉입니다.
요셉은 13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노예의 사슬과 감옥의 어둠 속에 갇혀 있었습니다. 만약 그에게 지혜가 없었다면, 그 시간은 그저 ‘형들에게 배신당한 억울한 사건’이자 ‘인생이 꼬인 불운’일 뿐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기도의 무릎으로 고난의 시간을 통과하며, 사건을 사건으로 보지 않고 하나님의 계획으로 바라보는 영적인 안목을 얻었습니다.
형들을 만난 요셉의 고백을 보십시오. 그는 “형들이 나를 팔았다”는 인본주의적 사실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지혜로 무장된 그는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앞서 보내셨나이다”라고 고난을 재해석했습니다.
- 해석 이전: “형들이 나를 팔았다” (분노와 복수의 대상)
- 해석 이후: “하나님이 나를 파송하셨다” (사명과 섭리의 대상)
이것이 바로 야고보가 말하는 ‘위로부터 난 지혜’입니다. 요셉은 이 지혜가 있었기에 13년의 모진 세월을 견디며 인내를 온전히 이룰 수 있었습니다. 고난의 의미가 ‘사명’으로 해석되는 순간, 더 이상 고난은 나를 파괴하는 공격이 아니라 나를 온전하게 빚으시는 하나님의 ‘파송 기간’이 되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 겪고 계신 시련을 요셉의 지혜로 다시 읽어보십시오.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십시오. 그때 여러분의 고난은 ‘사고’에서 ‘사명’으로 바뀌고, 그 해석의 힘이 여러분을 끝까지 인내하게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인내라는 ‘버티는 힘’과 지혜라는 ‘해석하는 눈’을 주길 원하십니다.
인내를 통해 우리 인격의 불순물을 제거하고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합시다. 그리고 기도를 통해 하늘의 지혜를 얻어, 내 삶의 모든 시련이 사실은 나를 온전케 하시려는 하나님의 ‘변장된 축복’이었음을 선포합시다. 인내로 머물고 지혜로 해석할 때, 우리는 비로소 세상이 줄 수 없는 가장 고귀한 구원의 선물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대럴 스콧(Darrell Scott)의 예화
미국 콜로라도주 리틀턴의 콜럼바인 고등학교 총기 난사 사건으로 딸 레이첼을 잃은 대럴 스콧의 이야기를 나누겠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사랑하는 딸을 잃은 이 아버지는 감당할 수 없는 분노와 슬픔이라는 ‘고중량의 시련’ 앞에 섰습니다. 그는 가해자들을 증오하며 인생을 망칠 수도 있었지만, 하나님 앞에서 그 고통을 견디며 **’인내’**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는 기도를 통해 딸의 죽음이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 이 땅의 청소년들에게 ‘친절과 사랑’의 가치를 전하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이라는 ‘지혜(해석)’를 얻었습니다. 그는 ‘레이첼의 도전(Rachel’s Challenge)’이라는 재단을 세워 전 세계 학교를 다니며 증오 대신 사랑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는 고난 속에서 주저앉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고통을 통해 자신의 성품이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닮은 형상으로 변화되는 축복을 경험했습니다. 인내로 그 자리를 지켰고, 지혜로 그 비극을 사명으로 해석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고난은 하나님께서 당신을 ‘아들의 형상’으로 빚으시겠다고 보내신 거룩한 초대장입니다.
오늘 여러분의 삶을 짓누르는 그 무거운 시련을 하나님께 그대로 올려드리십시오. 도망치고 싶었던 그 자리에 인내로 머물며,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십시오.
여러분이 고통의 무게를 견뎌내는 바로 그 순간, 여러분 안의 불순물은 타버리고 정금 같은 주님의 성품이 빚어질 것입니다. “하나님, 저를 마음껏 빚어주십시오. 이 시련 끝에 주님의 얼굴을 닮은 자로 서게 하옵소서.” 이 거룩한 기대로 고난을 정면으로 통과하십시오. 마침내 우리를 온전케 하실 하나님의 선하심이 여러분의 삶을 통해 증명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