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 ‘아바드(עָבַ드)’의 삶
본문: 여호수아 24장 14-15절
노병의 마지막 유언과 영적 위기감
오늘 우리는 한 시대의 거인이 남기는 마지막 뒷모습 앞에 서 있습니다. 평생을 하나님의 군대 장관으로 살았던 110세의 노병 여호수아, 그의 몸에는 전장의 흉터가 훈장처럼 새겨져 있습니다. 요단을 건너 가나안 성벽을 무너뜨렸던 승리의 기억이 스쳐 가지만, 지금 그의 마음을 가득 채운 것은 타는 듯한 ‘영적 위기감’입니다. 눈에 보이는 전쟁은 끝났으나, ‘세속화’와 ‘우상숭배’라는 더 무서운 보이지 않는 전쟁이 시작되었음을 직감했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가 본문에서 반복하여 외치는 핵심 단어는 ‘섬기다’, 히브리어로 ‘아바드(עָבַ드)’입니다. 이 단어는 단순한 종교적 의식을 넘어 ‘종이 되어 봉사하다, 노동하다, 경작하다’라는 삶의 헌신을 뜻합니다. 여호수아는 광야와 전쟁터에서 오직 여호와의 말씀만을 목숨 걸고 ‘아바드’하며 살았습니다. 그에게 하나님은 관념 속의 신이 아니라, 순종하는 삶 속에 실제로 역사하시는 ‘살아계신 왕’이셨습니다.
안타깝게도 그의 예감대로 이스라엘은 곧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사사 시대의 비극으로 접어듭니다. 내가 왕이 되어 나 자신과 세상의 풍요를 섬기는 삶이 시작된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이 비극을 막기 위해 백성들의 가슴에 비수를 꽂듯 묻습니다.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만을 섬기겠노라!” 오늘 여러분은 무엇을 ‘아바드’하고 계십니까? 유혹의 시대 속에서 여호수아가 만난 하나님, 그분이 요청하시는 진정한 섬김의 의미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 ‘아바드’는 종의 자세입니다: 전적인 순종과 겸손 (The Posture of a Servant)
히브리어 동사 ‘아바드(עָבַ드)’의 명사형은 ‘에베드(עֶ베드)’입니다. 이는 곧 ‘종’ 또는 ‘노예’를 뜻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긴다’고 할 때, 그 첫 번째 의미는 나의 권리와 고집을 내려놓고 주인이신 하나님 앞에 철저히 엎드리는 종의 자세를 취하는 것입니다. 고대 사회에서 종은 자기의 뜻이 아니라 오직 주인의 뜻에 따라 움직이는 존재였습니다.
진정한 섬김은 내가 원하는 방식, 내가 편한 시간, 나의 조건에 맞추어 하나님을 대우하는 것이 아닙니다. 창조주이신 주님 앞에 피조물인 우리가 지극히 겸손하게 엎드려, 그분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태도가 바로 ‘아바드’의 첫 번째 본질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호수아는 백성들에게 “섬길 자를 택하라”고 강하게 도전하기에 앞서, 2절부터 13절까지 긴 분량을 할애하여 하나님이 어떤 일을 하셨는지 소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조상 아브라함을 이방 신을 섬기는 곳에서 불러내셨고, 모세와 아론을 보냈고, 애굽에서 인도하셨으며, 요단을 건너 여리고성을 함락시키고 가나안 땅을 정복하도록 승리를 주신 분이십니다. 또한 건축하지 아니한 성읍을 주셨고 심지 아니한 포도원과 감람원의 과실을 먹게 하신 분이십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주인이십니다.
국제정세가 매우 혼란스럽고 내일 일을 예측하기 힘든 시대에 살고 있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이 상황을 컨트롤하고 계시는 역사의 주관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겸손하십시다. 내 생각, 내 계획 내려놓으시고 주인되시는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순종합시다.
[시131:1]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시편기자처럼 큰 일과 내가 감당하지 못할 일들은 하려고 너무 애쓰지 마세요. 염려하지 마시고 겸손한 종의 마음을 가지십시오.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와 단원] 오케스트라의 단원은 아무리 뛰어난 실력을 갖췄어도 지휘자의 손끝을 떠나 자신만의 소리를 내지 않습니다. 지휘자의 해석에 자신을 완전히 맞추는 ‘겸손’이 있을 때 비로소 최고의 화음이 나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종으로 산다는 것은 내 인생의 지휘봉을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는 과정입니다. 나의 삶의 주인 되신 하나님을 섬기는 여러분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둘째, ‘아바드’는 예배입니다: 하나님만을 향한 배타적인 경배 (Exclusive Worship)
여호수아는 14절에서 “너희의 조상들이 강 저쪽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치워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고 명령합니다. ‘아바드’는 구약성경에서 제사장들이 성소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예배하는 행위를 표현할 때 사용된 단어입니다. 즉, 섬김은 곧 예배(Worship)입니다. 여호수아가 “치워 버리라”고 명한 신들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 강 저쪽(메소포타미아)의 신들: 아브라함의 조상 데라가 섬기던 우상들로, ‘오래된 습관과 전통’을 의미합니다.
- 애굽의 신들: 이스라엘이 400년 동안 접했던 풍요와 힘의 신들로, ‘세속적 가치관’을 의미합니다.
오늘날에는 나무나 돌로 만든 형상보다 더 교묘한 ‘마음의 우상’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을 방해합니다. 내 뜻과 계획이 말씀보다 우선되는 자기 숭배(Self-ism), 돈과 소유에서 안정을 찾으려는 물질주의, 그리고 하나님께 집중하지 못하게 만드는 디지털의 분주함이 그것입니다. 여호수아 시대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양다리를 걸치려 합니다. 세상의 풍요와 하나님을 동시에 섬기려 합니다. 그러나 ‘아바드’의 섬김은 배타적입니다. 모든 가치를 치워 버리고(put away),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절대적인 경배의 대상으로 삼는 것입니다.
[혼인 서약의 배타성] 결혼식에서 “나는 당신을 사랑하지만, 가끔은 다른 사람도 사랑하겠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사랑의 본질은 ‘배타성’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고 하신 것은 독재자가 되고 싶어서가 아니라, 우리를 신부로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양다리를 걸치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듯, 양다리를 걸치는 ‘아바드’는 예배가 아닙니다.
우리가 왜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겨야 합니까? 하나님만이 창조주이시며 예배받기 합당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여 우리 구원을 위해 자신의 아들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10:45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예수님은 섬기기 위해 오셨고, 나의 죄 값을 구속하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섬기셨습니다. 그 사랑을 먼저 받았기에 우리도 주님을 예배자로 섬깁니다. 그 사랑 앞에 이제 우리가 고백할 차례입니다. “주님, 나를 위해 먼저 행하신 그 사랑 때문에 저 또한 오직 주님만을 섬기겠습니다.”
셋째, ‘아바드’는 삶입니다: 종교 행위를 넘어선 삶의 예배 (Worship as a Lifestyle)
‘아바드’가 가진 또 하나의 놀라운 의미는 바로 ‘일하다(work)’, ‘노동하다(labor)’, ‘경작하다’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창조하시고 에덴동산을 ‘경작하며(아바드)’ 지키게 하셨을 때 처음 쓰인 단어입니다. 여호수아가 14절에서 “온전함과 진실함으로(in sincerity and in truth) 그를 섬기라”고 한 것처럼, 우리의 고백을 넘어 일상의 치열한 현실 속에서 거룩하게 살아내는 삶의 수고가 동반되어야 합니다. 삶이 예배가 되고, 예배가 삶이 되는 것이 ‘아바드’의 완성입니다.
로마서 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이것이 우리에게 주는 영적인 도전은 매우 큽니다. 주일에 지성소에서 주님을 만나며 예배한 사람들은 나머지 교회 밖의 삶이 곧 예배가 됩니다. 주님의 임재안에서 삶이 예배가 됩니다. 섬김은 주일 예배당의 의식에만 머무르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매일 살아가는 삶의 현장, 일터, 가정이 곧 하나님을 섬기는 ‘아바드’가 되어야 합니다. “일터가 곧 지성소입니다.”
[에덴의 농부 아담] 창세기 2장 15절에서 아담이 에덴동산을 ‘경작할 때’ 사용된 ‘아바드’는 제사장이 성소에서 직무를 수행할 때와 같은 단어입니다. 아담에게는 밭을 갈고 나무를 가꾸는 ‘노동’이 곧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였습니다. 거룩함은 성전의 담벼락 안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땀 흘리는 현장으로 흘러가야 합니다.
[마틴 루터의 구두 수선공]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그리스도인 구두 수선공이 할 일은 구두 위에 작은 십자가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 좋은 가죽으로 정직하게 가장 튼튼한 구두를 만드는 것이다.” 신앙적인 티를 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Coram Deo) 성실하게 내 일을 해내는 것이 진짜 섬김입니다.
에베소서 6:7 “단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하고 사람들에게 하듯하지 말라”
회사에서 보스가 보든 말든 주님께 하듯 최선을 다하는 것이 아바드 섬김입니다. 주방과 사무실 책상이 성소임을 기억하십시오. 주일에 받은 은혜를 월요일의 업무 태도와 친절로 나타내십시오. 그것이 없다면 신앙은 그저 ‘종교적 취미 생활’일 뿐입니다.
여호수아의 말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21절에 “우리가 정녕 여호와를 섬기겠나이다”반응합니다. 그 때 여호수아는 백성들에게 단호하게 명령합니다. “너희 중에 있는 이방 신들을 제하여 버리라!”
여러분, 오늘 말씀을 듣고 여호와만 섬기겠다고 결심하셨습니까? 그렇다면 주님은 이방 신을 버리라고 말씀합니다.
이 명령은 오늘날 우리에게 “나의 갈증을 해결해 줄 것이라 믿고 붙들고 있는 ‘가짜 신’을 버리라”는 말씀과 같습니다. 이 영적 원리를 가장 잘 보여주는 사건이 바로 요한복음 4장의 사마리아 여인 이야기입니다.
생수를 갈망하지만, ‘남편’을 찾는 인생 예수님은 목마른 여인에게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을 약속하시며 뜻밖의 질문을 던지십니다.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이는 그녀가 평생 ‘생수’ 대신 붙들고 살았던 ‘우상의 실체’를 드러내신 것입니다.
“남편이 없나이다” – 우상의 허무함을 깨닫는 고백
그녀에게 남편은 행복의 조건이자 생존의 도구, 즉 ‘이방 신’이었습니다. 하지만 여섯 명을 거쳐도 갈증은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여인의 고백은 “그들은 나의 구원자가 아니었습니다”라는 영적인 항복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우상의 실패’를 인정하는 고백 위에서 진정한 생수의 역사를 시작하셨습니다.
여러분의 ‘여섯 번째 남편’은 무엇입니까? “이 정도 돈만 있으면 안전하겠지”, “내 자녀가 성공하면 목마름이 사라지겠지”라고 믿는 것들이 우리의 우상입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의지하는 한 우리는 영원히 목마를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여호수아 앞에 선 이스라엘처럼, 야곱의 우물가 사마리아 여인처럼 고백합시다. “주님, 제가 의지하던 가짜 남편들을 이제 제하여 버립니다. 오직 주님만이 나의 유일한 참사랑이며 생수이십니다.” 지금 여러분 마음속의 ‘이방 신’인 재물, 자존심, 안락함을 즉시 제거하십시오.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그분의 목소리만을 청종하겠나이다!” 이 결단이 여러분의 삶을 새롭게 할 것입니다.
[결론]
형제자매 여러분, 여호수아는 앞으로 다가올 영적 위기를 느끼며 죽음을 앞두고도 단호했습니다.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우리도 오늘 이 자리에서, 가정으로 돌아가서, 매일의 선택 속에서 하나님 한 분만 사랑하고 의지하는 자로 살아갑시다. 우리의 섬김은 어디를 향하고 있습니까? 진정한 섬김(아바드)은 주님 앞에 종으로 겸손히 엎드리는 것이며, 오직 주님만을 유일한 예배의 대상으로 삼는 것입니다. 또한 치열한 일상의 노동 속에서 순종을 실천하여 삶이 예배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환경과 상황이 어떠하든 상관없이 여호수아의 이 위대한 고백이 저와 여러분의 고백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기도]
주님, 우리의 마음을 온전히 사로잡아 주옵소서. 우상이 되어버린 모든 가짜 남편들을 치워 버리고, 오직 주님만 섬기는 가정이 되게 하옵소서. 환경이 아니라 내 마음의 평안이 오직 주님께로부터 오게 하시고, 오늘부터 매일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습니다”라고 삶으로 고백하게 하옵소서. 우리를 위해 먼저 생명을 주어 섬기신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